은주와 영희는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둘 사이에는 비밀이 없었다.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다 보니 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빛만 봐도 알 정도였다.
고등학생이 된 은주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한 학년 선배인 남학생이었다.
은주는 영희에게 그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시시콜콜 털어놨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희는 그저 잘해보라며 시큰둥하게 응원해 줄 뿐이었다.
어느 날 은주는 다른 친구에게서 그 선배가 영희를 좋아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알고보니 영희와 그 선배는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은주는 영희가 왜 자신에게 그런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인지 의아했다.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은주는 영희의 행동이 전부 의심스럽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둘 사이는 점차 삐걱거리며 멀어졌다. 결국 둘은 복도에서 마주쳐도 인사 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주는 영희와 그 선배가 벤치에서 사이 좋게 이야기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녀의 눈에 질투심이 타올랐다.
그날 저녁 은주는 영희를 학교 옥상으로 불러냈다. 둘은 사소한 말다툼을 벌였다.
끝까지 영희는 은주의 의심을 부인했다.
말다툼이 점차 격해지다가 화가 난 은주가 영희를 난간 밖으로 밀어 버렸다.
영희는 머리부터 떨어져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하지만 은주의 거짓 진술로 그 사고는 영희의 자살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은주는 얼마 뒤 그 선배와 사귈 수 있게 되었다.
선배와 학교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들은 더위도 식힐 겸, 한밤중에 학교에서 만나 스릴 넘치는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은주가 먼저 도착하여 빈 교실에서 선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그가 오지 않아 점차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콩..콩..콩..
복도 쪽에 뭔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교실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엔 없네..”
선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갈라지고 쇳소리가 나는 음친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콩..! 콩..! 콩..!!
바닥을 울리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또다시 드르륵 교실 문이 열렸다.
"여기도 없네.."
콩콩콩.. 콩콩..!!
은주는 교탁 밑의 틈으로 문 쪽을 살펴봤다.
그런데 교실문 쪽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은주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며 은주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 있네!!!!!"
그 순간 은주의 비명소리가 온 학교에 울려 퍼졌다.
A와 B는 단짝이었다. A는 유난히 몸이 약한 B를 신경 쓰고 챙겨줬다.
B는 그런 A가 항상 고마웠다. A가 없었다면 자신은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B에게 A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낡은 구교사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하필 그곳에 B가 있었다.
B는 화재 현장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그만 목숨을 잃었다.
A는 B의 죽음에 크게 상심했다.
그 불길 속에서 B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간절히 A를 찾던 그 목소리는 목이 쉬어가며 점차 원망 섞인 소리로 바뀌어갔다.
A는 B의 죽음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슬펐다. 그 뒤로 A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잠이 들어도 꿈 속에서 B가 나타나 너는 어디에 있었냐며 자신을 원망했다.
잠에서 깨어있는 동안에도 B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따라다녔다.
분명 그것은 자신의 슬픔과 죄책감이 만들어 낸 환청일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괴로웠다.
괴로움과 죄책감 속에 A는 하루하루 다르게 야위어갔다.
어느 날 밤. A는 조용히 집을 빠져 나와 학교로 향했다.
항상 B와 앉아 얘기하던 운동장 벤치를 지나. B가 목숨을 잃은 그곳까지 걸어왔다.
아직도 B의 목소리는 A를 부르고 있었다.
A는 이제 그만 괴로움을 끝내고 싶었다.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슬픔과 죄책감을 벗어내기 위해 A가 택한 것은 자살이었다.
B가 있는 그곳으로 간다면, 이 목소리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거야..
A는 목을 맸다.
숨을 쉴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시야가 점차 어두워졌다.
자신을 마중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눈 앞에 B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희미한 푸른 빛을 띈 B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이 다가오며 A에게 속삭였다.
“고마워. 네가 죽어야 내가 살아날 수 있거든.”
A는 버둥거렸다. 그것은 자신이 환청이라고 생각했던, B의 목소리였다.
학교 생물실엔 이상한 소문들이 많았다.
표본이 살아 움직인다거나, 무언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린다거나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대부분의 괴담들은 과거 학교 건물에 얽힌 비화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학교 건물의 역사는 과거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때 당시엔 정치범 수용소로 쓰였다고 한다.
수용소의 일부에는 일본군에서 운용하는 연구실도 있었는데, 죄수들에게 끔찍한 인체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거기서 진행된 인체실험들은 하나같이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것들이라,
건물 안엔 한시도 쉬지 않고 사람의 비명소리가 메아리 쳤다고 한다.
학생들은 지금의 생물실이 있는 곳이, 바로 그 인체 실험 연구실이 있던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생물실에서 무슨 사고만 생기면, 그것이 실험으로 죽은 영혼들의 저주라느니,
연구실의 박사가 귀신으로 남아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오갔다.
생물실 한 쪽 구석에 있는 인체모형이 그때 인체실험을 당한 사람의 시체라는 애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몇 년 전에 있었던 ‘감금 사고' 였다.
D는 그다지 학업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유독 과학 분야에 관심이 많고 열심인 학새잉었다.
그런 그를 좋게 평가했던 과학 선생은 D를 과학 경진대회의 학교 대표로 추천하였다.
그것이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한 D는 엄청 열심히 공부했다.
특히 그가 신경 써 공부한 것은 인체구조에 대한 것으로, 매일 같이 인체모형을 앞에 두고 씨름을 했다.
과학 경진대회가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생물실에 혼자 남아 공부를 하고 있던 D는 갑자기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
그가 눈을 떴을 땐, 불이 꺼진 생물실의 어둠 속이었다. 불을 켜려고 했지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가는 문도 밖에서 잠겼는지 열리지 않았다.
그는 꼼짝없이 어두운 생물실에서 밤을 지새야 할 판이었다.
그런 상황이 되고 보니 그제서야 평소에는 신경 쓰지도 않았던, 생물실에 대한 온갖 소문들이 떠올랐다.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 생각이났다.
D는 점점 무서워졌다. 특히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인체모형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나 다름 없었다.
심장이 뛰고 점점 숨이 가빠졌다.
너무 무서웠던 D는 알코올 램프를 가져와 불을 붙였다.
그런데 그때 가만히 서있던 인체모형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D는 생물실 안에서 숨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그런데 죽은 D의 시체는 손톱이 모두 빠져있었고,
생물실의 문에는 그가 손톱이 빠질 때까지 긁으며 남긴 핏자국과 ‘인체 모형' 이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
Y고교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에는 관상용 물고기들이 있었는데, 학교가 워낙 오래 되었다 보니 물고기들도 크고 범상치 않았다.
사람을 알아보고 이야기까지 알아듣는 영물이란 얘기가 있었다.
D라는 여학생이 이 연못의 물고기들을 매우 아꼈다.
그녀는 관리인 대신 물고기 먹이를 챙기고 연못 주변도 정리했다.
별 일 없을 땐, 연못 근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연못에 오면 물고기들이 수면 근처를 재롱을 부린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친구들은 D를 '물고기 공주' 라고 불렀다.
그런데 학교에서 불량하기로 소문난 한 남학생 중 한 명이 D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손 버릇도 나쁘고 성질도 더럽다고 소문난 학생이었다.
그는 D에게 사귀자며 고백했지만, 그 자리에서 거절 당했다.
기분이 나빠진 그는 그 뒤로 D를 자꾸 괴롭히고 협박했다.
D는 괴롭고 힘들었지만 그냥 묵묵히 견뎌냈다. 언젠가 제풀에 지쳐 그만두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일어났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남학생은 연못까지 쫓아와 D에게 추근거렸다.
D가 이제 그만 좀 그만하라며 짜증을 내자, 성질이 난 남학생은 그녀를 밀었다.
D는 균형을 잃고 넘어져 연못의 바위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그는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D의 시체를 은닉하기로 했다.
그는 D의 시체를 조각 내어 연못의 물고기들에게 밥으로 던졌다.
바닥에 흥건했던 D의 피도 빗물에 씻겨 연못으로 흘러 들어갔다.
물고기들 말고는 아무도 그 끔찍한 범죄를 보지 못했다.
D의 실종이 알려져 경찰이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친구들의 증언에 따라 연못을 중점적으로 조사했지만 그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뒤로도 별 다른 단서는 발견되지 않고 사건을 그렇게 흐지부지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체육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옥상의 수영장에서 체육 수업을 받고 있던 중, 한 학생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사라진 학생의 주변에 있던 이들은, 갑자기 허우적거리더니 무언가에 잡힌 듯 물 속으로 끌려들어갔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수영장의 물을 다 빼고 찾아봐도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모두가 어리둥절할 때즘, 연못에서 사라졌던 학생의 시체가 떠올랐다.
짐승이 뜯어먹은 것처럼 너덜너덜해진 모습이었다.
사라졌던 학생은 D를 괴롭혔던 바로 그 남학생이었다.
그 뒤로 비 오는 밤이면 학교 연못이나 수영장에서 이상한 생명체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형상을 본 학생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물고기 또는 물고기의 모습을 한 인간이라고 얘기했다.
정재는 동아리 활동 때문에 한밤중이 되어서야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가 속한 동아리는 미스터리 연구회라는 곳으로,
학교 안의 소문뿐 아니라 다양한 도시괴담에 대해서 수집하고 연구하는 곳이었다.
요즘은 비정기 간행물인 미스터리 연구회지에 실릴 학원 괴담 시리즈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쁜 와중에 회장은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덕분에 모든 일을 부회장인 정재가 처리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늦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다리를 건너는 중에도 정재는 회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말을 걸어 왔다.
“학생, 물어 볼 게 좀 있는데..”
말을 겅어온 상대는 푸근하고 인자하게 생긴 할머니였다.
쪽을 지어 올린 머리와 허리가 굽은 모습이 시골에 계신 할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저도 모르게 대답을 하려던 정재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이 할머니는 왜 이 시간에 학교에 있는 거지?'
그 순간, 그는 얼마 전에 조사했던 괴담 하나가 떠올랐다.
Y고의 건물은 일제시대 때 지어진 것으로 6.25 전쟁 당시에는 피난민 수용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전쟁 통에 부모와 헤어진 고아들이 많았는데,
다들 자기 살기도 팍팍했던 지라 그 아이들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나, 고아가 된 아이들을 성심껏 돌봐주었다.
아이들도 그 할머니를 많이 의지하고 따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할머니를 특별히 경계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와 아이들이 모두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내심 찝찝하고 이상했지만,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일에 대해 함구했다.
그만큼 살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자가 수용소를 찾아왔다.
그녀는 사라진 아이 중 한 명의 엄마였다.
모진 고생 끝에 아이가 있는 수용소까지 찾아왔는데,
아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은 그 여인은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심 찝찝했던 사람들은 그 처절한 울음소리를 듣고 결국 마음이 움직였다.
사냥꾼이었던 남자의 안내를 따라 몇몇 사람들이 여인을 돕기로 했다.
그들은 아이들의 흔적을 쫓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 중턱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다 쓰러져 가는 오래된 움막이었다.
그 움막 안에서는 시체 썩는 악취와 얼마 안된 작고 새하얀 뼈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 할머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재는 갑자기 왜 그 괴담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불길한 마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도 그 할머니가 입고 있는, 오래되어 보이는 한복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정재를 채근하던 할머니의 인상은 점차 악귀와 같이 일그러졌다.
검고 퀭한 눈 구멍에서 붉은 광채가 번뜩였다.
할머니는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아깝다 아까워.."
다음 순간, 정재는 책상에 고개를 들며 정신을 차렸다.
아마도 자료를 정리하던 중에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잠들기 전 그가 읽고 있던 자료의 마지막엔 이런 경고가 붙어 있었다.
절대로 묻는 말에 대답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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